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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자농구 100년의 역사! 다섯 명의 스포츠가 백만관중을 열광케하기까지..

  • 1907~1930 1907년, YMCA의 총무 질레트는 체육사업의 일환으로 회원들에게 농구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남성들에게만 해당됐을 뿐,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로 조선 여성들이 농구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 여성들에게 농구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제3대 이화학당장이던 조세핀 O. 페인(Josephine O. Paine)로 때는 1911년이었다. 그는 앞서 1893년에도 이화학당 교과과정에 과감히 체조를 배정했던 인물로 우리 여성들의 체육활동을 도모한 선구자였다.

    본격적으로 여자 농구가 공개된 것은 남자 농구가 시작된 1907년으로부터 무려 18년 후인 1925년이었다.
    이화학당에 대학과정이 개설되면서 마련된 경기에서 우리는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서양여성팀과 맞붙었다. 키와 체력 등 모든 면에서 왜소했을 우리는 첫 경기부터 모두의 예상을 깨고 10대 1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1925년에서 1930년 대 초반까지 조선인 여학교들은 경쟁적으로 농구팀을 결성해 나갔다. 이미 농구부를 보유하고 있던 이화여고보와 이화여전을 비롯해 숙명여고보(1926), 경성여고보(1926), 진명여고보(1929), 경성여상(1930) 등이 잇따라 팀을 만들었다. 이른바 ‘학교농구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여자 농구는 지금의 전국체전인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와 당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사가 개최한 ‘여자올림픽대회’에 숙명여고보팀과 경성여고보팀이 출전, 큰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29년에는 숙명여고 농구단이 일본으로 원정을 떠나며 조선 대표팀으로써의 역량을 여과 없이 발휘했다. 봉건주의사회로 여성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 의미는 더욱 크다.
  • 1930~1945 한국 농구는 빠르게 성장하여 YMCA 중심에서 탈피, 학원 농구로 진화하였다. 1931년, 조선 농구 협회를 창립하여 한국 농구의 자립을 선언하였고, 1936년에는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연희전문이 농구 사상 최초로 전 일본 농구를 평정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의 국호는 아니었지만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여 일제의 텃세를 누르고 한국 농구인의 긍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하면서 우리 체육사에 어둠이 깔렸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어온 스포츠를 일절 금지시켰고,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에 1943년부터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남자든 여자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농구 경기는 일절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조선 침탈과 함께 30여 년간 쌓아온 우리 농구의 금자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1945~1950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우리는 ‘조선 농구 협회’를 발족하여 우리 농구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각종 대회와 사업을 창설하였다. 사업의 하나로 최초의 우리말 농구 규칙서가 발간되었고, 1947년에는 국제 농구 연맹에 가입하여 IOC 정식 회원국으로 승인 받았다.

    1946년 YMCA 체육관에서는 제1회 여자농구연맹전이 열렸다. 해방 후, 재건된 조선농구협회가 주최한 이 대회는 처음으로 여중부와 일반부로 출전 자격이 구분돼 치러졌다. 이 대회는 우리 여자농구의 발전 과정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여자농구 인프라(infra)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여자농구가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의 스포츠로 인정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 여학생팀과 일반팀을 구분하여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음이다.
    1948년에는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공포되면서 여자 농구는 비로소 ‘조선’ 대신 ‘한국 여자농구’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 농구는 다시 한 번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 1950~1960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남한의 모든 스포츠 활동과 행사는 과거 일제 말기의 암흑기처럼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스포츠에 대한 열망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분출구가 필요했던 우리는 부산 육군병원 농구 코트에서 다시 농구 경기를 시작했고, 1951년에는 인민군이 물러간 전남 광주에서 제32회 전국체전을 개최, 뜨거운 시합을 치렀다. 이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자 남녀 농구단은 본격적인 경기와 원정길에 나섰다. 1954년 1월, 연례행사였던 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열었고, 이 대회를 통해 선발전을 치른 여자 농구는 그해 16명의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꾸려 대만으로 원정을 갔다.

    이후 한국과 대만 간 여자농구 경기의 교류가 정례화 되며, 세계 속의 한국 여자농구가 조금씩 자리 잡았다.
    1957년에는 여자 농구의 효시인 한국은행 여자 농구단이 창단 되었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 선수 두 명이 경기여고 졸업 후, 갈 곳이 없게 되자 당시 경기여고의 코치였던 김정신 코치가 한은에 건의 및 추진하여 현실화된 야심이었다. 이후 한국은행팀의 창단은 1958년, 상업은행 여자 농구단 창단을 끌어내며 실업여자농구시대를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 1960~1970 1961년은 여자 농구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결론적으로 이 해에 한은팀과 상은팀 간 여자 농구정기전이 열리고 이를 발판으로 폭발적인 여자 농구 붐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그저 한순간의 붐이 아니라 금융권은 물론 일반기업도 여자 농구부를 창단하도록 이끈 것이다. 당시 국민들에게 있어서 스포츠의 주류는 여자 농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은팀과 상은팀의 정기전이 열린 첫날, 수용 능력이 3,000명이던 서울 운동장에는 유료 입장객 5,000여 명과 무료 입장객 2,000여 명 도합 7,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그 인기를 증명하였다.
    발전을 거듭하던 한국 농구는 1963년 박정희 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가 창설되어 새로 건립된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가졌으며, 1973년까지 총 10번에 걸친 경기 중 6회 대회를 제외한 9번의 대회에서 우리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4년에는 대학 농구 춘 , 추계 연맹전을 창설하였고, 1965년에는 제1회 서울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하였다. 1967년 제5회 체코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금보다 값진 은메달을 차지했고, 눈부신 플레이로 세계를 사로잡은 박신자는 세계 베스트 5에 선정 되었다.
    이어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여자농구는 1위에 올랐으며, 1968년 제2회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 역시 우승하며 세계 속에 우뚝 섰다.
  • 1970~1980 1960년대에 촉발된 여자농구 붐은 1970년대에 들어서 ‘여자농구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국민들은 물론 청와대까지도 여자농구에 관심을 보일 정도였고, 기업들은 앞 다투어 여자농구팀을 창단했다. 매년 신생팀이 기존팀에 가세하며 늘 10여 개 팀이 연맹전에 참가하여 1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을 벌였다.
    이 시기에는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제4회 대만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제2회 마닐라 아시아 여자 청소년 선수권 대회, 제5회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 제7회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 제8회 홍콩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의 우승과 제8회 서울 세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의 쾌거가 바로 그 증거이다.
  • 1980~1990 제9회 도쿄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과 1984년 LA 올림픽에서 강호 중국을 꺾으며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달리 부상이 심했고, 키에서도 상대팀에게 밀렸던 LA 올림픽. 그러나 한국인의 긍지와 특유의 악바리 근성으로 딴 은메달이기에 그 의미가 금메달 못지않았다.
    이를 계기로 바야흐로 여자농구의 시대가 정점에 다다르는 듯 했다. 인기 스포츠의 프로화를 권장한 전두환 정권은 야구, 축구, 민속씨름의 프로화와 동시에 1983년 겨울에는 농구대잔치 점보시리즈를 출범하였고 이는 농구의 중흥을 가져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힘이 넘치고 빠르게 진행되는 남자 농구에 여자농구가 비교되면서 오히려 여자 실업 농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85년 기아 남자 농구단이 창단되어 삼성과 현대만의 경쟁 구도가 삼성, 현대, 기아 삼파전으로 바뀌고, 관중들은 이충희, 김현준, 김유택, 허재의 치열한 볼 다툼에 매료되어 점차 여자농구를 잊어 갔다.
    물론 제10회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고, 제12회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와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하며 여자 선수들의 위력을 보여주었지만 멀어져간 관중을 다시 끌어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 1990~2000 점보시리즈의 코트 위에서는 남자 선수들의 노련미와 패기가 만나 전쟁 아닌 전쟁을 할 동안 여자 선수들은 여자 농구의 쇠락과 IMF의 직격탄을 동시에 감내해야 했다. 말 그대로 여자 농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이래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농구원로인 故 이성구 초대 총재와 IMF 속에서도 살아남은 5개 팀이 힘을 합쳐 1998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을 발족하고 여자농구를 프로화 했다.
    비록 극심한 진통을 겪었으나 WKBL은 아픈 시기를 오히려 약으로 삼고 다시 일어났다.
    1997년 제17회 방콕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했고, 제2회 부산 동아시아 경기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1999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개최된 제18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아시아에 배정된 단 1장의 시드니올림픽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참가해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8강 토너먼트에 합류했으며 전주원은 40분간 풀타임 활약을 하며 1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이른바 트리플더블을 기록했다. 이는 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6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2007년, 제22회 인천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숙적 중국과 일본을 잇달아 따돌리며 우승한 우리는 2008 베이징 올림픽 티켓을 획득하며 또다시 한국 농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쳤다. 비록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원하는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시간을 통해 또 다른 100년을 만들어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